성황리에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축복하며
정조와
그의 여자 성덕임에 대해 낱낱이 적어보겠다.
정조에 대해서
-정조의 진짜 어진은 남아있지 않음. 다 상상으로 그려진 초상화임.
대신 순조실록에 아버지 정조의 모습이 글로 남아있는데,
"이마와 뒤통수는 할아버지인 영조를 그대로 빼닮았다
이마가 반듯하고 네모진 턱은 이중턱에 콧날이 오똑하다
눈자위는 펑퍼짐하며 전택이 넓고
입이 크고 깊숙하며 네모나고
또래들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하였다.
정조는 실제로 의빈성씨가 죽은 후 급격한 노화가 오기 시작하며
40대부터는 이빨도 빠지기 시작했다고...
순조가 아버지 정조의 모습을 기억하려면 적어도 10대는 되어야 할 것임.
그런데 순조는 정조가 40살 다 돼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순조는 정조의 40대 모습만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정조는 조선 미남왕에 꼭 들어가는 인물임.
정조가 직접 쓴 일기인 일성록에서는
영조가 생전에 정조더러 너는 타고난 용모가 탁월하니 이는 나라의 무궁한 복과 다름없다는 칭찬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왕 중 활 제일 잘 쏨.
문무를 겸함.
화살 50발을 모두 명중시킬 수 있었으나 스스로 겸손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발은 과녁에 쏘지 않음.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다"라고 말씀했다 함.
참고로 이순신 최고 성적이 50발 중 43발... 이걸 기뻐서 난중일기에 기록하기도 했었음.
-검소했음.
ex)폐지로 만든 재생지를 씀.
음식은 몇 가지만 먹음.
-자칭 엄친아.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공부 좀 하시오"
잘난척을 많이 했다 함.
또 "경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함.
-말싸움 최강자.
실제로 정조와 논쟁 한 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함.
어느 선비를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가 그 임무를 할 수 있겠냐"라고 조롱함.
조선에서 1% 안에 드는 유학자들 조차 정조한테 쩔쩔맴.
-빽으로 급제한 신하 개망신.
정조 즉위 직후인 나이 스물셋에 신하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줌.
-경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암기한 조선시대 유일한 왕.
"00책 00쪽 00번째 줄에 뭐라 되어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00책의 00쪽에 000줄에 이렇게 되어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적어라"
-독서왕.
워낙 책을 많이 읽어서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 월례행사로 찾아가 책거리를 하심.
살해 위협때문에 새벽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독서를 했다는 설도 있음.
-의학에도 능통해서 자기병을 자기가 진단하고 처방함.
동의보감 부실하다고 보강하기도 함.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같은 문약한 선비들에게 하루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쏘기를 시킴.
이 외에도 문인들에게 술을 옥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었음.
참고로 이 시절 필통 크기는 붓이 수어자루가 들어가는, 현대 기준으로는 바가지만 한 크기.
이 때 고생한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원샷'을 피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옥필통 일화를 언급하며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약용과의 일화
정조가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을 주고자 시험을 열었는데
매번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3등만 하자
결국 화가난 정조는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라면서 베개를 던졌다.
-술버릇:술 권하기
술을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드셨는데,
한 번 드시면 취해서 움직이지 못 할 정도 였다고...
거기에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어거지로 술 권하기'였다고 함.
-담배 예찬론자.
"담배로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소화에도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
담배를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담배' 예찬시까지 지으셔 조회 때 신하들에게 읽게 함.
하지만 그의 아들인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
-왕으로서 유일무이하게 안경을 애용.
숙모님께
을바람에 기후(氣候) 평안(平安)하시온지, (숙모님의) 문안(問安) 알기를 바라옵니다.
(숙모님을) 뵌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보고 (나니) 든든하고 반갑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元孫)
-왕의 욕설과 막말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퀴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진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서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이 호로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오늘날로 따지면 ㅋ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한자로 글을 쓰시다가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으셨는지
갑자기 한글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이라고 쓰심.
어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바로 *새끼, **새끼 등의 욕을 함.
-로맨티스트?
정조보다 22살 많은 보수파 거물인 심환지에게 정조 21년에 보낸 편지 내용
"소식이 갑자기 끊어졌군. 경은 그동안 잠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어디에 갔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인가"
정조는 심환지가 답장을 하든 말든 줄기차게 편지를 보냄.
하루는
심환지에게는 "갈수록 입조심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라고 쓴 적도...
-이순신을 추모함.
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고 있음.
정조의 열애사에 대해서 (의빈성씨, 성덕임)
-유일한 승은후궁
조선 제 22대 왕 정조는 평생 궁녀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왕이지만
유일하게 빠진 승은후궁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성씨.
효의왕후, 화빈윤씨, 수빈박씨, 원빈홍씨는 전부 사대부 가문에서 간택했다면
의빈성시는 2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 이뤄낸 사랑의 결실이랄까.
-2번 까임.
'내가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빈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며 사양했다. 또한 이에 감히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빈의 마음을 느끼고 다시는 재촉하지 못했다. 그 후 15년 동안 널리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간택했다. 그리고는 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했다. 이에 빈이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빈은 비로소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어제의빈묘지명' 중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는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 15년 후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의빈성씨는 재차 거절했다.
그러자 빡친 정조는 의빈성씨의 시종을 크게 꾸짖고 벌하셨다고 함.
결국 의빈은 마침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고 이 때 그녀 나이 30살이었다.
-20년 동안 기다려서 결혼함.
'어제의빈묘지명'에는 '지금까지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20년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간행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1786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1786년을 기준으로 하면 정조는 1766년부터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뒀다는 얘기...
그렇다면 정조는 의빈에게 처음 거절당했을 때부터 의빈을 쭉 마음에 뒀다고 볼 수 있음.
-금슬
정조의 승은을 입은 성덕임은
승은을 입자마자 두번의 임신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유산했다.
그 후 세번째 임신을 한 끝에 문효세자를 낳는다.
그리고 연이어 옹주를 낳았으나 생후 2개월도 채 안되어 사망하였고,
셋째를 임신했으나 뱃속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둠.
즉, 의빈성씨는 승은을 입고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5번을 임신함.
참고로 중전인 효의왕후는 출산을 하지 못 했고
첫번째 후궁인 홍국여의 누이 원빈 홍씨는 입궐한지 몇 달만에 갑작스레 사망...
두번째 후궁인 화빈윤씨는 상상임신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정조는 상상임신 이후엔 찾아가지고 않았다고...
-문효세자에 대한 사랑
문효세자가 태어난 다음날 바로 전용 동궁을짓게 하는데 이게 바로 창덕궁 중희당이다.
세자 책봉 또한 문효세자는 만 22개월이 됐을 때 책봉된 반면
순조는 11세에 책봉되었다.
-의빈성씨 죽음
문효세자가 홍역때문에 5살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의빈성씨는 시름시름 앓다 임신 9개월인 몸으로 뒤따라감.
독살 당했다는 의혹이 있기도 함.
정조는 의빈성씨가 사망하자 여자에 대한 감정을 유일하게 실록에 드러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194) 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왕이 직접 쓴 비문
그녀의 죽음을 키통해 하는 정조의 '어제비문'에서 의빈성씨를 생각하는 정조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 너의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빈궁(嬪宮): 임금의 후궁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잡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실제 기록에 본명이 알려진 조선시대 궁녀 두명 중 한명.
로맨티스트 정조덕에 의빈 성씨는 실제 기록에 본명이 알려준 조선시대 궁녀 두명 중 한명이 되었다.
장희빈과 함께..
-문효세자와 나란히 묻어줌.
정조는 못다한 정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선시대에는 세자 신분이 엄연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효세자와 덕임이의 무덤을 나란하게 해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강제이당 당함.
아쉽게도 성덕임이자 의빈성씨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나
초상화는 없다.